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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글 159

[고민] 듀얼스크린 기기의 춘추전국시대, RG DS Plus, 듀오, 듀오 라이트 사이에서 나는 무엇을 사려 하는가

요즘 갑자기 듀얼스크린 게임기가 많아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택지는 사실상 양극단에 가까웠다. 싸고 DS처럼 생긴 RG DS가 있었고, 반대편에는 비싸지만 성능으로 웬만한 것은 다 해결할 수 있는 AYN Thor(토르)가 있었다. 나는 둘 다 써봤다. RG DS는 이전 글에서 이야기했듯 결국 방출했다. [사용기] RG DS를 정리한 이유(ft. RG DS Plus 공개)나에게 가장 기억에 오래 남아 있는 콘솔이 무엇이냐고 한다면,닌텐도 DS라고 답할 수 있다.정확히는 NDSL(닌텐도 DS Lite) 어릴 때 가장 많이 가지고 놀았던 게임기이기도 하고,지금도 종종 DS 게임mi-sang.tistory.com 위아래 같은 크기의 화면을 가진 클램셸이라는 형태 자체는 정말 마음에 들었고, DS 게임을 켰..

테크/잡담 2026.09.18

부자 역관의 고집스런 몰락 양반 함락기(?) (청구야담 가람본 10-12)

아름다운 인연을 맺은 이팔 낭자(結芳緣二八娘子)  영조(英祖) 말년에 채생(蔡生)이라는 선비가 가세가 빈곤하여 남문 밖 만리재(萬里峴)에 우거하니 와옥(蝸屋, 달팽이집처럼 좁고 누추한 집)이 모두 무너지고 단표(簞瓢, 가난한 살림의 끼니)도 여러 번 비었다. 채생의 부친은 개제(愷悌, 온화하고 단아함)하고 졸직(拙直, 질박하고 곧음)하여 염정(恬靜)으로 그 몸을 지키고 기한(飢寒)을 견디며 굶주림과 추위로도 그 뜻을 바꾸지 아니하여 오직 그 자제를 엄히 가르쳐 가정을 잇고자 하였다. 한 가지라도 옳지 않은 것을 보면 일찍이 용서하지 아니하여 반드시 발가벗겨 노망태 속에 넣어 높이 들보에 달고 큰 매로 치며 말하기를, “내 가문의 흥망성쇠가 네 한 몸에 매였으니 모진 벌이 아니면 어찌 가히 허물을 고치겠느..

[사용기] 레트로이드 포켓 노바 사용기, 정말 훌륭한 4:3 게임기. 그런데 나에게는 굳이?

게임기를 살 때마다 비슷한 생각을 한다. 이번에는 진짜 오래 가지고 갈 수 있지 않을까? 레트로이드 포켓 노바를 봤을 때도 그랬다. 4.5인치 4:3 화면1280×960 해상도120Hz AMOLED 거기에 스냅드래곤 8 Gen 2급의 성능까지 갖췄다.스펙만 놓고 보면 내가 꽤 오랫동안 바라던 4:3 레트로 게임기의 완성형에 가깝다. 실제로 구매해서 사용해보니 기기 자체에 대한 만족도도 무척 높았다.화면은 기대했던 그대로였고, 성능은 차고 넘쳤으며, 무엇보다 가볍고 작은 크기 덕분에 휴대용 게임기로서의 만족감도 좋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묘하게 손이 가지 않는다. 기기가 별로여서가 아니다.오히려 반대다. 정말 잘 만든 기기인데,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가를 생각하면 답은 점점 “굳이?”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

테크/리뷰 2026.09.15

과거 급제에는 이르고 늦음이 없다 (청구야담 가람본 10-11)

장원을 길러내며 과거마다 반드시 꿈꾸다(養壯元每科必夢)  낙정(樂靜) 조석윤(趙錫胤, 1606~1655)이 장원급제하니 실제 방하동년(榜下同年, 같은 과거의 급제자)이 전례에 따라 창방(唱榜, 급제자를 발표함) 전에 장원에게 뵈는지라, 동년 가운데 수염과 머리털이 반백이 된 자가 와 뵈었다. 자리에 앉자 그 사람이 눈을 들어 자세히 보다가 웃어 말하기를, “이상하고 괴이하도다. 장원을 길러내어 함께 등과하였으니 어찌 늙지 아니하리오?” 공이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호남 사람으로 과장(科場)에서 늙은 자라. 어려서부터 경사(京師, 서울)에 들어와 과거를 본 것이 그 수를 알지 못할 정도요. 길을 가다가 매양 진위(振威) 갈원(葛院)에 이르면 꿈에 한 아이를 보았는데 그러면..

그대 발인 줄 알았다네 (청구야담 가람본 10-9)

재상이 희롱하여 매화의 발을 움켜쥐다(宰相戱掬梅花足)  옛날 한 재상의 부인이 성품이 엄하고 법도가 있으니 재상이 매우 꺼려 늘 부인에게 업신여김을 받을까 두려워하였다. 그 집에 한 여종이 있었는데 이름은 매화(梅花)라 하고 나이가 삼오(三五, 열다섯)에 이르렀으며 모습이 매우 고우니 재상이 매양 뜻을 두었다. 그러나 여종이 부인의 좌우에 있으므로 그 틈을 얻지 못하고 오직 추파(秋波, 정을 담은 눈길)로써 은근한 마음을 보내면 여종이 매우 냉락(冷落, 냉담하게 대함)하니 대개 부인의 강정(剛正, 굳세고 바름)함을 두려워해서였다. 어느 날 재상이 내방에 앉아 있고 부인이 대청에서 집안일을 보살피는데 여종이 부인의 명으로 방 안에 들어와 다락에 올라갈 때 한 발이 다락문 밖에 드리워졌다. 재상이 그 발을 ..

니 서얼 아이가 커서 뭐하겠습니까 (청구야담 가람본 10-10)

어릴 적 약속으로 첨사가 되다(得僉使兒時有約)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 일찍이 한가히 앉아 있는데 맹인 함순명(咸順命)이 와 뵈었다. 공이 말하기를, “무슨 일로 부중(府中)에 왔느냐?” 순명이 말하기를, “진실로 긴급한 일이 아니면 어찌 비를 무릅쓰고 오겠습니까?” 공이 말하기를, “우선 네가 청하는 바는 두고 먼저 내 청을 들어보는 것이 어떠하냐?” 박 판서 서(朴遾, 1602~1653; 가람본 원문에는 ‘연’으로 표기됨)가 어릴 때 공에게 수학하여 마침 자리에 있었는데, 공이 박아(朴兒, 어린 박서)의 사주(四柱)를 가리켜 물어 말하기를, “이 아이의 명수(命數)는 어떠하냐?” 순명이 한참 추수(推數, 운수를 헤아림)하여 말하기를, “이 아이는 가히 병판(兵判, 병조판서)..

아버지 그 집 아니에요~~ (청구야담 가람본 10-8)

산골 백성이 남의 축문을 잘못 읽다(峽氓誤讀他人祝)  한 재상의 자제가 부친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마치고, 일찍이 일을 인하여 산골로 가다가 날이 저물고 주막이 먼지라 한 민가에 묵기를 청하였다. 그 집에서는 바야흐로 개와 돼지를 잡아 많이 요리하고 있었다. 공자(公子, 재상의 아들)가 그 까닭을 물으니 그날 밤이 주인의 제삿날이었다. 밤이 깊도록 훤요(喧擾, 시끄럽고 떠들썩함)하여 눈을 붙이지 못하였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떠드는 소리가 전보다 열 배나 하고 제수를 차리는 그릇 소리가 귀를 요란하게 하였다. 마침내 독축(讀祝, 축문을 읽음)할 때 축사에 말하기를, “유세차(維歲次) 계유년 5월 20일이라.” 하니 공자가 누워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오늘은 갑술년 5월 16일이거늘 어찌 작년 오월로 독축..

두 사람은 문제아지만 최강, 차천로와 한석봉 이야기 (청구야담 가람본 10-6, 10-7)

차 오산이 병풍을 사이에 두고 백운을 부르다(車五山隔屛呼百韻)  차오산(車五山) 천로(天輅), 곧 차천로(車天輅, 1556~1615)는 문장과 시가 한 시대에 유명하여 비록 정교함과 거침이 서로 섞였으나 즉석에서 만언(萬言)을 지어내고 흥이 도도하여 궁진하지 아니하니 세상에 감히 대적할 자가 없었다. 선조 말년에 천사(天使,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 1558~1624)이 조선에 나오니 주공은 본래 풍류 있는 남자로 강남의 재사(才士)라 이르는 곳마다 사한(詞翰, 시문과 글씨)이 빛나 천하에 회자되니 조정에서 빈사(儐使, 사신을 접대하는 관원)를 특별히 가려 뽑았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를 접반사(接伴使)로 삼고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을 접위관(接慰..

잘린 목에서 흰 피가 나온 기인 이광희 (청구야담 가람본 10-5)

이 상사가 병으로 인해 도의 묘함을 깨닫다(李上舍因病悟道妙)  진사 이광희는 예로부터 고질이 있어 방서(方書, 의서)를 널리 상고하다가 문득 묘술(妙術)을 깨달아 기이한 일이 많았다. 늘 냉수를 마시고 한 등의(藤椅, 등나무 의자)를 대청 위에 두고 누워 구르기를 여러 차례 하고 몸을 높은 데 거꾸로 달아 물을 토하여 위장을 세척한다고 일렀다. 또 일찍이 멀리 나가 놀 때 홀연 뻣뻣이 죽었다가 수일 후 도로 깨어나더니, 어느 날 집안사람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이제 멀리 가서 한 달이 넘은 뒤 돌아올 터이므로 한 친한 벗을 청하여 내 몸을 대신하여 지킬 것이니 반드시 잘 대접하라.” 말을 마치자 기절하였다. 식경(食頃, 밥 한 끼 먹을 동안)에 다시 살아 일어나 앉아 그 아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그대..

역리를 깨달은 승의 예언으로 화를 피한 이식(청구야담 가람본 10-4)

택당이 승려를 만나 역리를 논하다(澤堂遇僧談易理)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은 젊어서부터 병이 많아 과업(科業)을 폐하고 오로지 병 조리하기를 일삼았다. 집이 지평(砥平) 백아곡(白鴉谷)에 있었는데 용문산(龍門山)이 가까운지라 일찍이 『주역(周易)』을 가지고 용문사(龍門寺)에 이접(移接, 옮겨 머묾)하여 역리(易理)를 깊이 연구하였다. 한 승려가 나무를 져 생계를 이었는데 해진 장삼 하나와 바리때 하나뿐이라 절 안의 여러 승려들이 사람 축에 끼워 주지 않았다. 공이 매양 밤이 깊도록 등불을 마주하여 부지런히 글을 읽으니 여러 승려들은 모두 자되 부목승(負木僧)은 홀로 남은 불빛을 빌려 짚신을 삼으며 자지 않았다. 어느 날 공이 문의(文義)를 궁구하기를 매우 고심하여 날이 새기에 이르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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