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가람본 청구야담

종이는 배신하지 않았으나, 급제자는 배신했네(청구야담 가람본 8-6)

주인 미상 2026. 8. 28.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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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곤륜이 급제한 뒤 맹세를 저버리다(崔昆侖登第背盟)

 



최 부제학 창대는 문장이 뛰어나고 재명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을 뿐 아니라, 용모가 출중하고 풍채도 남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아직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한 상태였다.

늦봄 알성시를 앞두고 최생이 나귀를 타고 어느 곳을 지나가는데, 홀연 어떤 사람이 나귀 앞으로 다가와 절하였다.

최생이 돌아보며 물었다.

“너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기억하지 못하겠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소인은 지전의 시정 사람 아무개입니다. 일찍이 한 번도 문안드린 적은 없으나, 그윽이 충심으로 아뢸 일이 있습니다. 조용히 말씀드리지 못하면 제 진정을 고할 수 없을 듯합니다. 소인의 집이 바로 이 집이니, 비록 매우 황송하오나 잠시 들어가 쉬시기를 청합니다.”

최생은 그 말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나귀에서 내려 그 집 사랑으로 들어갔다. 방과 벽은 깨끗하였고 서화가 벽에 가득하였다.



자리를 잡자 집주인이 몸을 굽혀 앞으로 나와 말하였다.

“소인에게 딸 하나가 있는데 나이는 열여섯이고 제법 자색이 있습니다. 평생 소원이 젊은 명사의 부실(副室)이 되는 것이어서 아직 정혼한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젯밤 꿈에 정초지(正草紙) 한 장이 홀연 황룡으로 변하여 공중으로 날아올랐습니다. 딸아이가 잠에서 깨어 이상하게 여기고 꿈속에서 용이 되었던 종이를 찾아 여러 겹 싸서 봉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이번 과거에 이 종이로 응시하는 사람은 반드시 높이 급제할 것이니 내가 직접 그 사람을 골라 종이를 주고 그의 첩이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저희 집이 마침 큰길가에 있어 아침부터 행랑을 깨끗이 쓸고 발을 창밖으로 드리운 채 온종일 오가는 사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서방님의 행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급히 소인을 불러 모셔 오라 하였기에 당돌하게 청한 것입니다.”

이윽고 큰 상 하나를 내왔는데 음식이 모두 정갈하였다.

집주인은 딸도 불러 보였다. 꽃 같은 얼굴과 달 같은 자태가 참으로 경성의 미인이었으며, 눈썹과 눈매가 맑고 빼어나고 거동도 한아하여 보통 여염집 여자와 달랐다.



집주인은 다시 정초지 한 장을 공손히 올리며 말하였다.

“이것이 소인의 딸 꿈에서 용이 되어 날아올랐던 종이입니다. 과거일도 가까웠으니 서방님께서 이 종이로 답안을 작성하여 제출하시면 반드시 급제하실 것입니다.

방을 발표하는 날에는 저희가 비천하다고 꺼리지 마시고 곧 교자를 보내 제 딸을 데려다가 오래도록 첩으로 삼아 주십시오. 이것이 평생의 소원이니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최생은 이미 여자의 빼어난 자색에 마음이 끌린 데다 꿈의 징조까지 비상하게 여겼다. 마침내 분명히 허락하고 굳게 언약한 뒤 돌아갔다.



과거일이 되자 최생은 그 정초지를 가지고 시험장에 들어갔다.

일필휘지로 답안을 지어 제출하였는데, 과연 장원으로 뽑혔다.

이름이 방에 불리고 어사화를 꽂았다. 풍악이 울려 퍼지고 영광이 세상에 빛났다. 집으로 돌아오자 수레가 문 앞에 모이고 하객이 대청에 가득하였다. 노래하는 아이와 춤추는 여인들이 앞뒤로 늘어서고 진수성찬이 좌우에 가득하였다.

관현악은 흥을 돋우고 창우는 재주를 펼쳤다. 구경하는 사람들도 거리와 골목을 가득 메웠다.



어느덧 날이 저물고 빈객들이 흩어졌다.

최 급제는 전날 굳게 했던 언약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젊은 사람이라 생각이 미처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고, 아버지에게 그 연유를 아뢰지도 못하였다.

더구나 급제한 날의 분주함 때문에 직접 일을 주선할 겨를도 없었다.

그렇게 막 잠자리에 들려는데 홀연 대문 밖에서 매우 애통하고 처절한 곡성이 들려왔다.

한 사람이 가슴을 두드리며 목 놓아 울면서 곧장 대문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하인들이 온갖 방법으로 몰아내려 했지만 그 사람은 죽기를 각오한 듯 버티며 외쳤다.

“지극히 원통한 일이 있어 선달님께 아뢰려 합니다.”

최 급제의 아버지가 이 일을 듣고 이상하게 여겨 그 사람을 앞으로 불렀다.

“네게 무슨 원통한 일이 있기에 우리 집에 경사가 난 날 이렇듯 해괴한 행동을 하는가?”

그 사람은 다시 울고 절하며 목이 메어 대답하였다.

“소인은 바로 지전의 시정 사람 아무개입니다.”

그리고 딸이 황룡의 꿈을 꾸었던 일부터 최생과 맺은 언약까지 하나하나 이야기하였다.



그는 이어 말하였다.

“과거일이 되자 제 딸은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직 방이 발표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자꾸 서방님이 급제하셨는지를 물었기에 소인이 여러 차례 알아보았습니다.

마침내 댁의 서방님께서 장원급제하셨음이 분명하다는 소식을 듣고 딸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딸아이는 크게 기뻐하며 교자가 와서 자신을 데려가기만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딸은 잠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얼빠진 듯, 미친 듯이 있었습니다.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그저 긴 탄식만 몇 차례 하였습니다.

소인이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온갖 말로 달랬습니다.

‘방을 발표하는 날에는 자연히 분주한 일이 많고, 하객이 문에 가득하며 응대할 일도 많을 것이다. 한가한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것이니 서방님이 잠시 잊은 것도 이상하지 않다.

설령 잊지 않았더라도 분주하여 미처 일을 주선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내가 그 댁에 가서 축하하고 형편을 알아보고 와도 늦지 않다.’

그러자 딸이 말하였습니다.

‘만일 저를 마음속 깊이 두었다면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깊은 정이 있다면 아무리 분주하더라도 교자를 갖추어 저를 데려오는 것은 한 번 분부하면 될 일입니다. 어찌 그럴 틈조차 없겠습니까?

서방님의 마음속에는 이미 소녀를 생각하는 뜻이 없으므로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미 나를 잊고 데려갈 뜻도 없는데 제가 먼저 사람을 보내 사정을 알아보는 것 또한 부끄러운 일입니다.

더구나 제가 알아본 뒤 마지못해 저를 데려간들 무슨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백년을 함께 즐기는 것은 정과 의리와 믿음에 달린 것인데, 굳게 맹세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이렇듯 변하였으니 앞으로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제 뜻은 이미 정하였으니 다시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러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소인의 분함이 가슴에 맺히고 슬픈 원한이 하늘에 사무쳤기에 감히 이곳에 와서 아뢰는 것입니다.”



최 정승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참혹함을 이기지 못하여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아들을 불러 크게 꾸짖었다.

“이것이 얼마나 큰일인데 네가 이미 저들과 서로 약속하고도 이렇듯 맹세를 저버렸느냐?

세상에 어찌 이같이 체면도 없고 신의도 없는 사람이 있겠느냐? 박정함이 심하고 원한을 쌓게 한 것이 극심하구나.

나는 처음 너를 큰 그릇으로 알았다. 그러나 이 일로 보건대 족히 볼 것이 없구나.

네가 무슨 일을 제대로 판단하며 무슨 벼슬을 제대로 하겠느냐?”

최 정승은 탄식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어 아들에게 명하였다.

“즉시 전수(奠需)를 잘 마련하고 제문을 지어라. 네 죄를 모두 알고 있음을 밝히고 뒤늦게 후회하지만 이미 미치지 못하게 되었음을 사죄하여라.

시신 앞에서 울며 장례에 필요한 제구(?)를 모두 갖추고, 네가 직접 살펴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여라.

그렇게 해서 조금이나마 언약을 저버린 죄를 속죄하고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한을 위로하도록 하여라.”

또 관곽과 수의, 장례에 필요한 여러 물품을 넉넉히 주어 여자를 매장하게 하였다.

그 뒤 최곤륜, 곧 최창대는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으나 일찍 죽었다고 한다.

 


 

 

여인은 꽤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지전 상인의 딸이었지만, 양반가의 첩이라도 되고 싶었고

그렇기에 본인이 스스로 남편감을 골랐던 것이다.

스스로의 안목이 빗나감을 알고 스스로 목을 맬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은 생각도 든다.

신의를 져버렸으므로 미래에도 어차피 그저그런 사람일 것이다 라는 생각으로 자살하는 것보다

권도를 따라, 현실을 따라

아버지 말을 들었더라면 전혀 다른 결말이었을 것이다.

여인은 무엇을 따른 것이었을까?

 

그리고 곤륜 최창대는 실제로는 50여년을 살았다.

거기다 부제학까지 올랐는데, 일찍 죽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도 하다.

이건 의도적으로 최창대의 인물됨에 대한 소문을 내는 이야기였거나,

원래 이러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최창대의 이름이 어디선가 덧붙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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