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운으로 처방한 이인(投良劑病有年運)
동현(銅峴)에 큰 약국이 있었는데, 어느 날 한 늙은 선비가 해진 옷과 짚신 차림으로 홀연히 들어와 한 모퉁이에 앉아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날이 기울도록 가지 않았다.
주인이 괴이하게 여겨 묻기를,
“어느 곳 손님이신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하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어떤 객과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으므로 와서 지금 기다리고 있으니, 이 약국에 오래 머무는 것이 미안합니다.”
하였다.
주인이 말하기를,
“무엇이 미안하겠습니까?”
하였다.이윽고 주인이 저녁밥을 권하니 그 사람이 응하지 않고 곧바로 문밖으로 나가 밥집에서 밥을 사 먹고 다시 와 전처럼 앉아 있기를 여러 날이었으나 기다리던 손님은 보지 못하였다.
주인이 의아하게 여겼으나 또한 박절하게 물리치지 못하였다.
문득 한 사람이 와 말하기를,
“제 아내가 바야흐로 해산하다가 갑자기 온몸이 뻣뻣해져 인사불성이 되었으니 원하건대 좋은 약을 얻어 이 위급함을 구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주인이 말하기를,
“그대는 무식하구나. 약을 파는 자가 약간의 의술을 안다고 하여 혹 병증을 묻는 이가 있으나 나는 의원이 아니니 어찌 이런 큰 증세에 처방을 내겠는가? 만일 의원에게 물어 처방을 받아 오면 즉시 지어 주겠다.”
하였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본래 아는 의원이 없으니 바라건대 약을 얻어 사람을 살려 주십시오.”
하였다.
그 선비가 끼어들어 말하기를,
“만일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 세 첩을 쓰면 즉시 나을 것이오.”
하였다.
주인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 약은 막힌 것을 내리고 답답한 것을 푸는 처방이니 해산병에 쓴다면 얼음과 숯처럼 서로 맞지 않는다. 그대는 한갓 입에 익은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하였다.
그 선비가 고집하자 그 사람이 말하기를,
“일이 급하니 아무 약이라도 써 보겠습니다.”
하고 지어 달라 하니 황급히 가지고 갔다.
저녁때 또 한 사람이 와 말하기를,
“제 이웃 아무개의 아내가 해산하다 죽게 되었는데 신약을 이 약국에서 얻어 회생하였다 하니 여기에 반드시 명의가 있는 듯하여 왔습니다. 제 아이가 지금 세 살인데 두창(痘瘡)이 매우 위중하니 좋은 약을 구합니다.”
하였다.
그 선비가 또 말하기를,
“곽향정기산 세 첩을 또 쓰시오.”
하였다.
주인이 말하기를,
“서민들은 일찍이 약을 먹지 않았으므로 그중 강장한 사람은 혹 이 약으로 효험을 보겠지만 아직 강보를 벗어나지 못한 아이에게는 결단코 이 약을 쓸 수 없고, 하물며 두창에는 더욱 만만부당하오.”
하였다.
그 사람이 굳이 청하니 주인이 마지못하여 또 지어 주었다. 이윽고 그 사람이 와 사례하며,
“그 약에 신기한 효험을 보았습니다.”
하였다.
이로부터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문에 가득하였는데 그 선비는 모두 곽향정기산으로 응하였고 효험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머문 지 여러 달이 되었으나 떠나지 않았고 기다린다는 손님도 오는 일이 없었다.
어느 날 재상의 자제가 약국 문에 오자 주인이 마루에서 내려가 맞고 물을 뿌리고 쓸어 깨끗이 하며 집안 사람들이 모두 분주하였으나 그 노인은 홀로 나무 궤 위에 앉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재상의 자제가 물어 말하기를,
“부친의 병환이 오래도록 낫지 않으신 지 여러 달인데 온갖 약이 효험이 없어 원기가 점점 쇠진하십니다.
이제 영남의 한 의원을 맞아 보제(補劑)를 처방하게 하였더니 의원이 말하기를, ‘묵은 약재로는 효험을 얻기 어려우니 친히 약국에 가 새로 나온 당재(唐材)를 골라 법에 맞게 조제하면 가히 효험을 바랄 수 있다.’ 하므로 주인을 찾아왔으니 부디 상품을 잘 골라 처방대로 정성껏 지어 주시면 은혜를 갚겠습니다.”
하고 또 소리를 낮추어 물어 말하기를,
“저 궤 위에 앉은 손님은 누구입니까?”
하였다.
주인이 말하기를,
“요사이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하고 마침내 처음부터 끝까지 말하였다.

재상의 자제가 이에 옷깃을 바로 하고 그 앞에 나아가 부친의 증세를 고하고 좋은 약을 청하니 그 노인은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다만 말하기를,
“곽향정기산이 좋습니다.”
하였다.
재상의 자제는 속으로 웃고 앞서의 약을 지어 가지고 돌아가 한편으로 약을 달이게 하며 부친에게 그 노인의 말을 하고 한 번 웃었다.
재상이 말하기를,
“이 약이 맞지 않는다고만 할 수 없으니 한 번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떠하냐?”
하였다.
자제와 문객이 모두 말하기를,
“원기가 몹시 쇠한데 어찌 소산시키는 약을 쓰겠습니까? 결단코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재상이 묵묵히 있었다.
이미 앞서의 약을 달여 왔는데 재상이 말하기를,
“먹은 것이 소화되지 않았으니 아직 두어라.”
하고 밤이 깊자 그 약을 몰래 엎어 버리고 좌우 사람에게 곽향정기산 세 첩을 몰래 지어 한데 섞어 큰 차관에 넣어 달여 세 번에 나누어 마셨다.
이튿날 일어나 앉으니 정신이 맑고 기운이 편안하여 병의 뿌리가 이미 풀렸다.
그 아들이 문후하자 재상이 말하기를,
“묵은 병이 갑자기 없어졌다.”
하였다.
그 아들이 말하기를,
“영남의 아무개 의원은 가히 편작(扁鵲)이라 할 만합니다.”
하니 재상이 말하기를,
“아니다. 약국의 노인은 어느 곳 사람인지 모르지만 참으로 신의(神醫)다.”
하고 이어 앞서의 약을 엎어 버리고 곽향정기산을 달여 먹은 일을 말하였다.
또 말하기를,
“여러 달 된 위중한 병이 하루아침에 나았으니 그 은혜가 크다. 네가 친히 가서 맞아 오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 아들이 명을 받들어 급히 약국에 가 감사한 뜻을 말하고 함께 가기를 청하자 그 노인은 옷을 떨치고 일어나 말하기를,
“내가 잘못 서울에 들어와 이런 더러운 말을 듣게 되었구나. 내가 어찌 막중(幕中)의 빈객이 되겠는가?”
하고 마침내 표연히 떠났다.
그 아들이 멍하니 돌아와 그 연유를 말하니 재상이 말하기를,
“개결하고 풍속에서 빼어난 사람이구나.”
하고 탄식하기를 마지않았다.
이윽고 임금의 옥체가 편찮으셔 점점 위중해지시니 조정이 모두 근심하고 황급해하였다.
그 재상이 그때 약원 제조를 겸하고 있었는데 마침 전날 자기 집의 일을 생각하여 들어가 진후하고 탑전에서 아뢰기를,
“곽향정기산이 유익할지는 모르오나 또한 해로운 바도 없을 것입니다.”
하고 곧 달여 들여 올려 드리니 이튿날 옥체가 평복하였다.
임금이 더욱 감탄하여 그 사람을 물색해 찾게 하였으나 마침내 찾지 못하였다.
아는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이인(異人)이다.”
하였다.
대개 의서에 이르기를 연운(年運)이 순환함이 있으니 한때의 온갖 병이 비록 서로 다르나 그 병의 뿌리는 연운이 부리는 바이다.
진실로 그 연운을 알아 그에 합당한 좋은 약을 쓰면 비록 그 증세에 직접 해당하는 약이 아니더라도 효험이 있다.
근세의 의원들은 이 이치를 모르고 다만 증세를 따라 약을 쓰므로 공연히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대저 이 사람은 미리 임금의 옥체에 병환이 생길 줄 알고 이 약이 아니면 능히 평복하시기 어려울 것을 알았으므로 짐짓 약국에서 이러한 일을 벌인 것이었다.
(from. GPT)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은 원래 중국 송대 『태평혜민화제국방(太平惠民和劑局方)』에 실린 처방으로, 조선에서도 『동의보감』 등을 통해 널리 쓰였다. 기본적으로는 풍한·습(濕)이 겹치면서 비위가 상해 생기는 구토·설사·복통·소화불량·몸이 무겁고 으슬으슬한 증상 등에 쓰는 처방이다. 『동의보감』도 곽란(霍亂)에 사계절 두루 쓸 수 있는 처방으로 곽향정기산을 제시한다. (약학정보원)
대표 구성은 곽향(藿香)을 중심으로 소엽, 백지, 대복피, 복령, 후박, 백출, 진피, 반하, 길경, 감초 등을 넣고 생강·대추와 함께 달이는 형태다. 전통적으로는 芳香化濕·解表和中, 즉 습기를 풀고 겉의 사기를 흩으며 비위의 기운을 조화시키는 약으로 이해되었다. (약학정보원)
그래서 이 야담에서 약국 주인이 반대한 이유가 분명하다. 곽향정기산은 상식적으로 보면 소화기 증상, 토사곽란, 외감풍한 같은 데 쓰는 약이지, 해산 중 인사불성이 된 산모나 세 살 아이의 두창, 원기가 쇠한 재상의 오래된 병에 똑같이 세 첩씩 쓸 약이 아니었다. 실제 처방 설명도 주로 구역·설사·복통·복부팽만·식욕부진과 오한·발열 같은 증상을 대상으로 한다. (약학정보원)
따라서 작품 속 주인의 말,
“이 약은 막힌 것을 내리고 답답한 것을 푸는 방문이다.”
는 곽향정기산의 일반적인 성격을 꽤 정확히 짚은 것이다. 뒤에서 가족들이 쇠약한 재상에게 이것을 쓰려 하자 “원기가 적패한데 어찌 소산하는 약을 쓰겠느냐”고 반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핵심은 바로 그런 상식적인 변증론을 뒤집는 것이다. 늙은 이인은 환자의 개별 증세를 보고 처방한 것이 아니라 연운(年運)이라는 그해의 공통적인 병인에 맞춰 곽향정기산 하나를 계속 쓴다. 산후병, 두창, 재상의 숙병, 심지어 임금의 병까지 증상은 전혀 다른데 모두 낫는다. 마지막 평어도 “한때의 백병은 서로 달라도 병근은 연운이 부리는 바”라고 설명한다.
즉 이 이야기에서 곽향정기산은 그냥 유명한 약이 아니라, “증세에는 전혀 맞지 않아 보이는 처방인데 그해의 운기에는 정확히 맞는 약”이라는 역설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처방이다. 그래서 제목의 投良劑病有年運도 결국 “병에는 연운이 있으므로 그 연운에 맞는 양제를 투여한다”는 의미로 읽는 게 좋다.
참고로 여기서 생각해야 할 곽향정기산은 19세기 말 이제마가 『동의수세보원』에서 변형한 소음인용 곽향정기산보다는, 『화제국방』→『동의보감』 계통의 전통 처방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제마의 처방은 일부 약재 구성이 달라진 별도의 변방이다. (encykorea.aks.ac.kr)
이야기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는
다 다른 증상임에도 동일한 처방을 내린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인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보게 만든다.
그렇지만 모든 처방이 효험을 보이고 심지어 왕까지 살리게 된다.
그러므로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을 서사 밖에서 서술자가 해설해준다.
모든 것이 이인이 연운을 읽었기에 가능한 처방이며
이는 임금에게 추후 연운에 맡는 약처방을 은근히 귀띔하기 위한 것이라는,
국가와 임금은 천명이 다스리고 있음을 전제한 해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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