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가람본 청구야담

아내의 탈룰라 (청구야담 가람본 9-16)

주인 미상 2026. 9. 5.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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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서백이 역마에 기생을 태워 보내다(關西伯馹騎馳妓)

 



양녕대군은 세종의 형님이다. 일찍이 말미를 받아 관서로 유람하러 갈 때 세종이 작별에 임하여 거듭 여색을 경계하니 대군이 공경히 사례하고 갔다.

임금이 관서 도신에게 명하여,

“대군이 만일 가까이하는 기생이 있거든 즉시 역마에 태워 올려 보내라.”

하였다.

대군이 성교를 받들어 여러 고을에 엄히 명하여 기생들을 물리쳤다. 방백과 수령이 이미 임금의 명을 받았으므로 아름다운 기생을 구하여 온갖 방법으로 유혹하게 하였다.

대군이 정주에 이르니 청산녹수 사이에 대숲이 있고, 대숲 사이에 몇 칸의 정사가 있는데 한 미인이 소복 차림으로 어슴푸레한 가운데 있어 슬피 우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니 사람의 간장이 녹을 듯하고, 반쯤 드러난 화용월태(花容月態)를 가까이 보니 심신이 날아갈 듯하였다.

대군이 한 번 보고 정을 이기지 못하여 사람을 시켜 가서 부르게 하니 스스로 생각하기를,

‘오늘날 이 일은 귀신도 능히 알지 못하리라.’

하였다.

그날 밤 그녀와 친압하고 한 절구를 지어 주었는데, 이르기를,

“明月不須窺繡枕
명월불수규수침
밝은 달은 모름지기 수놓은 베개를 엿보지 못하는데,

夜風何事捲羅幃
야풍하사권나위
밤바람은 무슨 일로 비단 휘장을 걷는가.”

하니 그 은밀한 뜻을 이른 것이었다.

이튿날 도백이 그 기녀를 역마에 태워 올려 보내니 임금이 그 기녀로 하여금 밤낮으로 그 시를 익혀 노래하게 하였다.

대군이 돌아오자 임금이 맞아 위로하고 이어 말하기를,

“지난번 작별할 때 여색을 경계하라 한 말을 기억하시오?”

하니 대군이 말하기를,

“성교를 어찌 잊겠습니까? 감히 가까이한 바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형님이 능히 금수총중(錦繡叢中)에서도 경계를 지켜 돌아오셨으니 그 아름답고 기쁜 일을 위하여 아름다운 기녀 하나를 구하여 기다리고 있었소.”

하고 이어 궁중에 잔치를 베풀어 기녀로 하여금 그 시를 노래하여 술을 권하게 하였다.

대군이 밤에 잠깐 가까이하였던지라 그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였는데 그 시가를 듣자 섬돌 아래로 내려 땅에 엎드려 대죄하였다.


임금이 친히 뜰에 내려와 그 손을 잡고 웃고 마침내 그 기녀를 대군의 궁으로 보냈다.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어머니의 성과 관향을 알지 못하므로 이름하여 말하기를,

“고정정(考定正)이라 하라.”

하니 지금의 이영하는 그 자손이다.

고정정은 광망한 종실로서 어육을 사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비록 삶은 것이라도 도로 물렸으므로 풍속에 전하여 억지로 무르는 것을 ‘고정정’이라 하였다.

참의 이영하가 일찍이 그 부인과 더불어 바둑을 두다가 억지로 무르려 하자 부인이 말하기를,

“그대가 이 고정정이오? 어찌 억지로 무르려 하시오?”

하니 참의가 노하여 말하기를,

“어찌 바둑을 둔 일로 사람의 조상을 희롱하시오?”

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이등제노처퇴평(李登第老妻推枰, 이씨가 급제하니 늙은 아내가 바둑판을 밀쳤다)”을 희제(戲題)로 삼았다고 한다.

 


 

정향전의 유화로 여기서는 그 후손에 대한 이야기에 좀 더 관심이 가 있다.

 

다른 유화에서는 세종과 양녕대군의 우애를 강조하거나, 기생(정향)과의 러브 스토리, 꾀 등을 상세히 풀어내는데

 

여기서는 그 둘 사이에 나온 자식으로부터 만들어진 "말"에 더 초점이 가 있다.

 

그들의 자식이 이미 손을 대서 물릴 수 없는 것을 어거지로 물리는 행위를 자주했다는 데서

 

그러한 행위를 그의 이름인 "고정정"으로 불렀다는 유래담인데,

 

왕족의 행위라도 비꼴 대상이면 그렇게 바로 대명사화 시켜버려서 비꼬아 버리는 게 재밌다.

 

특히, 이영하가 고정정의 후손인 줄 모르고 부인이 남편에게 "너가 고정정이냐?"하고 따지니

 

남편이 "왜 패드립함?"하면서 발끈하는 장면이 백미다.

 

나쁜 행위를 하면 그 이름이 자기와 자기 후손에게 (웃기지만)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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