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시를 쓴다. 실제로 요즘의 AI는 일정한 규칙을 학습한 후에, 인간보다 더 정교하고 감동적인 문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비유를 구사하고, 적절한 리듬을 만들고, 독자의 감정을 자극하는 능력도 갖췄다. 더 놀라운 건, 인간이 쓴 글과 AI가 쓴 글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시를 쓸 이유는 이제 사라진 걸까?
그러나 인간이 시를 쓰는 이유는, 반드시 문장 구조나 창작 능력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은 시를 잘 쓰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인간은 ‘살기 위해’ 시를 쓴다. 사랑을 견디기 위해, 상실을 이해하기 위해,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감정을 다루기 위해 우리는 언어를 꺼낸다. 그 언어는 문법이 아니라 체온이며, 기교가 아니라 고백이다. 시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존재의 무게를 감당하려는 몸짓이다.
AI는 감정을 흉내낼 수는 있다. 공감하는 척하고, 슬픈 분위기를 잡고, 위로하는 문장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태를 흉내 내는 것’일 뿐이다. AI는 상실을 경험하지 않고, 고통을 앓지 않으며, 불안 속에서 잠 못 이루지 않는다. 그렇기에 AI의 시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거기에 ‘누가 살았는가’를 묻기 어렵다. 그것은 그냥 생성된 결과다.
반면, 인간이 쓴 시는 설령 서툴고 불완전하더라도, 그 안에 **‘살아낸 흔적’**이 담긴다. 그 문장은 어떤 시점에서 누군가에게 필요했고, 반드시 써야만 했던 말들이었으며, 쓰는 사람조차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적어 내려갔던 감정의 덩어리다. 시는 잘 쓴 문장이 아니라, 견디는 문장이다.
창작은 인간의 본능이자, 자기를 확인하는 행위다. 아무도 듣지 않아도 글을 쓰는 사람, 누구도 보지 않아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 평가받지 않아도 춤을 추는 사람. 이들은 모두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을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AI는 완성도 높은 결과를 보여주지만, 존재를 증명하려고 애쓰는 주체는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AI가 창작을 대신해도 시를 쓸 것이다. 오히려, 더 절박하게 쓸 것이다. 왜냐하면 창작은 기능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이유는 예쁘고 놀라운 문장을 만들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세상에 감당되지 않는 나의 마음을 어디론가 흘려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창작의 완성도가 중요해지는 시대에, 살아 있는 흔적으로서의 문장은 여전히 유효할까?
당신에게 시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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